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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7: 연극 <고역> 본문
연극 <고역>
날짜: 2021.02.27 토요일 3시(러닝타임 1시간 40분)
-연출: 신동일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블랙박스)
-작가: 김성배
-출연: 이동준 이주영 이종무 우상진 김선아 김성옥 외
-작품배경: 2018년 예멘 난민 500명이 제주도에 입국하여 난민 신청을 하여 국내에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다문화사회, 타인의 수용에 대한 문제를 상기시킴.
-요약:
*고역: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찬 인간세계 주인공 상요가 운영했던 게스트하우스 이름인 동시에 작품이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을 드러냄.
*언론의 등장: 우리사회에서 황색 언론들이 득실거렸다. 정확한 보도는 찾을 수 없고 선정적인, 난민의 대부분을 폭력적 성향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극중 등장하는 언론인 ‘규진’ 언론의 역할은 우리 시민들의 역할을 상기시킨다는 생각이 듦. 비판적 시각을 견지할 필요 있음.
*연출의도: 사회적 문제의 이해관계는 너무나 복잡하다. 그러나 이슈로만 소비되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지라도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고민을 이어가는 노력과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역>의 윤상요는 바로 그러한 지점을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지키는 일은 어렵지만 인간으로서 그게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에 대해 함께 알아가고 싶습니다.”
-내용
지난 2월 27일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연극 <고역>을 보고 왔다. 제목인 ‘고역’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 찬 인간세계라는 뜻이다. 극의 주인공 ‘상요’가 운영했던 게스트하우스 이름이기도 하여, 작품이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을 드러낸다. 연극은 다문화사회, 타인의 수용에 대한 문제를 상기시키고 있다.
2018년 예멘 난민 500명이 제주도에 입국하여 난민 신청을 하여 국내에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은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극을 관통하는 중요한 사건이 된다. 당시 대부분 이슬람 남성이었던 예멘 난민을 향한 선정적인 언론 보도가 쏟아졌고, 시민들의 공포심을 조장하는 황색 저널리즘에 대한 문제 또한 제기되었다. (나는 그 해 말에 시사인에서 발간한 '난민보고서'를 보고 내가 생각한 것과 또 다른 사실(진실)을 마주했다. 과연 진실이 무엇인지, 나는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때 이후로 여전히 고민이 된다. 어떤 사안과 사건에 대해 명확하게 나의 포지션을 정하고, 발언하는 것이. )
공연을 보기 전 예멘 난민 사건을 언급하는 홍보문구를 보고, 공연이 난민 문제를 어떻게 다루려는 것인가 궁금했다. 연극은 난민을 무대 위로 올리지 않는다. 다만, 다양한 인간군상을 통해 한국 사회가 난민을 인식하는 다양한 ‘시선’을 보여준다. 극은 얽혀 있는 이해관계를 비추는 과정에서 개인의 심연에 깔린 ‘역사적 사건’들을 상기시킨다. 난민, 즉 이주민으로 본래 살던 터전을 떠나와 새로운 공간에서 타자성을 지니게 된 존재들의 역사를 우리 근현대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랙 무대 공간에는 거대한 오동나무가 놓여있다. 관객석 위에도 나무의 가지가 매달려 있는데, 상요가 산 집의 전 주인 아들의 수목이었던 이 오동나무는 민주화운동, 걸프전 파병을 나간 주인 아들의 흔적이다. 상요는 전 주인과의 약속했기 때문에 절대로 오동나무를 벨 수 없다. 상요가 멕시코 용설란 농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린 아버지를, 멕시코에서 일어난 정치적 격변에 아버지를 잃은 아픔이 있음을 고려한다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나무가 상징하는 바는 명확한 편이다.
거대한 나무의 밑동(뿌리)과 이주, 이방인의 키워드는 얼핏 보면 대립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국가라는 뿌리를 잃고 떠돌아야 했던 식민지배 시기가 있었고, 강제노역과 강제이주를 경험한 분들이 있다. 타국에서 철저히 타자로 존재했던 이방인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작품은 인물의 갈등을 통해 그저 보여주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는데 극의 템포가 빠른 것은 아니었지만, 배우의 감정이 충돌하는 지점에 따라 강약을 조절했다고 생각했다. 극은 특별한 기교 없이도 묵직하게 논의할 점을 꺼내 놓았다. 배우분들의 연기도 인상 깊었다.
극 중 ‘규진’이라는 인물은 기자로 등장한다. 자식을 죽음으로 내몬 가해자에게 탄원서를 써준 ‘상요’의 태도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물음을 던진다. 규진은 황색언론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인데, 나는 규진이라는 캐릭터가 시민들의 역할을 상기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늘 자극적인 언론 보도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할 필요 있고, 사회 현안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내게 주인공 ‘상요’는 순교자 같은 인물로 비쳤지만, 공연이 진행됨에 따라 그가 가진 역사적 트라우마 안에서 타자를 대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상요라는 인물의 신념에 동의하는지, 동의하지 않는지의 여부는 개인의 자유이지만, 극은 ‘우리 또한 어딘가에서 이방인인 적이 있지 않냐고’ 묻는다. 그들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라는 것을, 그리고 현재 진행형인 문제임을 고려하며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도대체 인간답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 -민기-
다른 사람의 고통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함부로 분노하는 인간들, 나는 제대로 분노하지 못했어.
우린 이 게스트하우스에서 그들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고 싶다고, 희생했다는 만족일 뿐.
고역, 고통받는 사람들을 재우고,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했던 거야
-상요의 아내-
사실 내게 이 연극은 조금 어려웠다. 그 이유는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입장을 각 인물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차에 치여 아이를 잃어도 중국 국적 가해자를 향한 탄원서를 쓰며, 아내를 설득했던 상요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사람들을 받아들여 먹이고 재웠다. 탄원이 받아들여져 가해자가 석방되고 그는 이번엔 유괴를 저지른다. 그렇게 딸아이를 잃은 ‘민기’가 상요을 찾아온다. 민기는 상요의 주변을 맴돌며 그의 신념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다. 한편, 상요는 ‘그 일’ 이후 아내(경희)와 갈라선 상태이다. 경희는 자신의 위선적 태도에 대해 실망하고, 자신이 올바른 때에 분노하지 못했음을, 충분하게 애도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만약 극 중 상황이 내 일이라 가정했을 때 사건 당사자로서, 민기와 경희의 반응은 너무나 현실적이고, 당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인물들 모두 자신들의 사정이 있고, 누구 하나의 편을 들기가 매우 어렵다. 이에 대해 신동일 연출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지라도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고민을 이어가는 노력과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역>의 윤상요는 바로 그러한 지점을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지키는 일은 어렵지만, 인간으로서 그게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에 대해 함께 알아가고 싶습니다.”라고 언급했다.
나는 딜레마적 상황을 마주하면, 보통 무력감이 찾아오기 때문에 힘들어한다. 생각하는 과정 자체가 고통스러워지는 것인데, 이 극은 모국에서 살아가는 내가 언제든지 이주해, 타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딜레마적 상황을 상기시켰고, 인물 중 어느 한 편이 옳다고 결정할 수 없는 다면성의 레이어가 잘 드러났던 점에서 공연을 보며 인물들에게 내 모습이 겹쳐지면서 머리가 복잡해졌다.
언론, 이주민, 혐오, 그리고 분노와 용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묻는 연극의 질문은 쉽사리 답할 수 없는 것들이다. 연극을 보고 난 후 미셸 푸코의 <비판은 무엇인가>라는 책 중, 진실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파레시아' 개념이 떠올랐다. 파레시아는 그리스어 단어인 파레시아는 비판적 태도, 진실을 말하는 용기, 위험을 감수하는 말하기를 뜻한다. 어쩌면, 이것은 회피하고 싶지만 다가오는 문제이고, 현재 진행형이기에 고찰해야 하는 사건들에 대한 나의 태도를 성찰하게 하는 단어일 것이다.
공연을 보고 기록하는 나의 발자취 또한 어떤 부분에선 필연적으로 나의 사회참여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직접 발언하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발언하는 입장에 놓여있다는 것이 현재 내가 놓인 딜레마이다. 현재 내게는 딜레마를 마주했을 때 무력해지지 않고, 나아가기 위해 그것들을 말할 ‘파레시아’. -비판하고, 비판받을 용기-가 다분히,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